여행/자전거 여행

[일본 시코쿠 88개소 자전거 순례] 2nd day : 료젠지 할아버지

menzuru 2010. 11. 11.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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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nd day : 료젠지 할아버지

  애초에 일찍 출발하려고 마음먹고 눈을 붙였지만 밤새 뒤척이다 날이 밝아지기 시작해서 그냥 잠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새벽 4시 20분경)

<역사적인 첫 캠핑 - 키타지마중앙공원>

  아직 날이 푸르스름 했지만 씻기도 하고 텐트도 정리하자 새벽의 온도는 빠르게 사라져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조깅을 하는 노인들이 점차 눈에 띄었다. 나는 자전거에 짐을 다 장착한후 화장실로 자전거를 끌고 터벅터벅 걸었다.

<귀여운 동물 친구들, 난 왼쪽 길로 내려갔다.>

  어젯밤의 우울한 기분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88번 절까지 돌겠다며 집을 떠난 놈이 1번 절에 가기도 전부터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제 여기서 잤니?"
 무표정으로 걷고 있던 내게 왠 할머니께서 밝은표정으로 말을 거셨다. 간단한 대화 속에 시코쿠 88개소를 돌려고 왔다고 하니까 바로 할머니께서 "*오헨로상~" 하고 불러주시며 88개소를 다 돌고 돌아갈 땐 반드시 마음속에 무언가 얻어갈수 있을거라고 말씀하셨다.
 " *오셋다이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안가지고 나와서 어떻하지?"
하고 아쉬워 하시며 1번절 료젠지(霊山寺)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셨다. 도로쪽으로 나와서 설명을 듣는 중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할아버지와 인사를 하셨는데 아는 분이셨는지 한참을 뭔가 설명하시더니 할아버지께서 안내해 주실거라면서 따라가라고 하셨다. 할머니와는 그렇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꽤 긴 거리를 안내해주시는 할아버지.>

  따뜻한 아침햇살을 맞으며 할아버지의 뒤를 쫓아가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안내를 해주시는 할아버지의 이름은 키노우치 카츠지(木內 勝治). 키노우치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앞장서서 가시며 방향전환시, 신호정지시나 피해야할것이 있을때마다 손짓으로 상냥하게 알려주셨다. 가는 길에 로드킬을 당해 심하게 손상된 '무언가'가 있었지만 키노우치 할아버지의 손짓으로 직접 보지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료젠지를 향해 계속 된 할아버지의 안내>

  그렇게 달리면서 중간중간에 멈추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는데 일본문화에 대한 설명(아침해를 보고 합장을 한다거나..)을 듣기도 하고 연근에 대한 설명(멈췄을때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을 듣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간식을 받기도 했다.>

  한참을 가다가 편의점 앞에 멈추어 세우시더니 편의점으로 같이 들어갔다.

 "오니기리(삼각김밥) 먹을래?"
할아버지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부끄럽게도) 대답한 나에게 매실짱아치와 다시마짱아치같은 것이 맛있다고 골라주시고 큰 슈크림 빵도 사주셨다. 그리고 곧 1번절 료젠지에 도착했다.

<료젠지에 도착!>

  절이나 신사에 들어갈때 하는 의식(?)들에 대한 할아버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문 앞에서 합장하는것, 손을 씻고 들어가는것, 직접 동전을 쥐어 주시며 동전을 넣고 종을 치는 것 등을 알려주셨다. 절 안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너무 일찍와서 료젠지의 본당은 닫혀 있었다. 절 안의 연못에서는 무지하게 큰 비단잉어를 볼 수 있었는데 태어나서 본 잉어중 가장 큰 것 같다.

<잉어(左上), 연못의 동자승(右上), 닫힌 본당(左下), 닫힌 본당의 내부(右下)>

  료젠지를 나서면서 듣게된 키노우치 할아버지의 나이는 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게 만들었다. 73세. 10년은 젊어보이는 할아버지의 비결은 조깅이라고 하셨다.
료젠지 밖으로 나오자 바로 옆에 있는 신사(오아사히코신사大麻比古神社)에도 같이 가자고 하셔서 별 고민없이 할아버지를 따랐다.

<오아사히코신사(大麻比古神社)>

<할아버지의 쾌속 안내>

  시원한 길을 할아버지를 따라 달려 신사에 도착했다. 신사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할아버지의 아는 사람을 만나서 서로 인사를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 사람은 원래 배가 엄청 나왔었는데 할아버지가 조깅할 때 같이 끌고다녀서 배가 싹들어갔다고 조깅 예찬론을 잠시 펼치셨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손 씻는 법(左上), 손 씻는 곳(右上), 명부(?)(左下), 되돌아가는 길(右下)>


 "2번 절은 여기서 가까워. 거기도 같이 가줄까?"
 하셨지만 도움받은 것이 많아 충분히 감사했고 더 도움받으면 왠지 해를 끼치는듯 하여 사양했다. 할아버지와 아쉬운 작별 인사로 악수를 하고, 할아버지는 나보고 자신의 수첩에 사인을 해달라고 하셨다. 나는 찍은 사진을 보내드릴 주소와 성함을 받았다. 한두푼의 돈보다 훨씬 갚진 인연 덕분에 어제의 고생과 아침의 우울함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이날 할아버지의 따뜻함은 여행이 끝날때까지 계속 마음속에 남아 힘을 주었다.

<四国 第1番 霊山寺>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이제 본격적으로 혼자가 되었다. 이후 어려움없이 계속 절을 돌았다. 이대로라면 생각보다 빨리 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2번절 고쿠라쿠지(極楽寺)를 지나 금새 3번절 콘센지(金泉寺)까지 도착하여 할아버지가 사주신 삼각김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四国 第2番 極楽寺>

<2번 절 안의 순례 지도, 저 빨간 길을 따라 가게 된다.>

<전용 패니어가 없다면 이런 일도 비일비재.(나중엔 요령이 생긴다)>

<지나다 본 묘지, 흔히 볼 수 있다.>

<四国 第3番 金泉寺>

<할아버지께 얻은 것들>

  느긋하게 앉아 휴식을 취하다가 자전거 헬멧이 깨진 것을 보았다. 비행기 수화물로 오는 중에 파손된 것 같았는데 첫날 초반에만 쓰고 계속 거슬렸기 때문에 헬멧을 버리고 가기로 결정했다(미안하다 친구야).

<올라 앉아 여유롭게 아침식사>

<평화롭다>

<시코쿠에선 이런 표시들을 따라가면 길치도 자전거 여행이 가능하다!>

  느긋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다르게 4번절 다이니치지(大日寺)를 가는 길에는 꽤나 고생해야 했다. 시코쿠의 순례길은 도보로 가는길과 자동차로 가는길이 따로 있다(겹치기도 함). 사실 시코쿠 순례길은 자전거로는 좀 애매하다. 걷는 길로도 불편(위험하기도)하고 자동차 길로도 힘들다. 이번 길처럼 자전거로 가기 힘든 길은 자동차 길을 이용해야 한다. 이때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오프로드 진흙 산길을 X발이라는 배기음을 내며 끌고 올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남의 집 논 옆에서.>

<이 길의 끝엔 어둠이..>

<보기에도 불편한 길에 온갖 표시가 다 있다.>

<숲속에도 불상같은 것이 있다.>

<시코쿠 순례길에 대한 안내>

<안녕 바깥세상..>

  좁은 산길에다가 늪에 가까운 진흙길.. 게다가 경사도 가파른 정말 최악의 길이었다. 깨끗했던 내 자전거가 진흙 범벅이 되어 오프로드에 어울리는 자전거가 되자 온로드와 만날 수 있었다. 가는길에 88개소를 도는 서양인을 만났는데, 스쳐 지나가면서 머리를 숙여서 인사하는게 어색하고 재밌었다.

<수줍은 TV를 뒤로 하고>

<절이 보인다!>

<四国 第4番 大日寺>
 
<앞으로도 자주 볼 녀석>

<귀여운 꼬마들, 정말 병아리 같다>

<四国 第5番 地蔵寺>

<어디서든 길 안내를 받는다>

<전형적인 일본 농촌 풍경>

<길가에 물이 떨어지고 있다.>


<셀카도 한장!>

  자전거 여행의 여유를 만끽하면서 달리는 중, 처음으로 오헨로휴게소를 발견하였다. 편의점에서 샀던 미니 크로와상과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디저트로 여유로운 휴식을 즐겼다. 처음으로 만난 오헨로 휴게소 였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그냥 신이 났지만 의자에 누워보기도 하며 혼자 자전거 여행자의 분위기를 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순례자들을 위한 휴게소>

<빵은 하나씩 넣어가지고 다니면 좋다.>

<四国 第6番 安楽寺>

클릭! Click!
<6번절에도 엄청난 크기의 잉어들이 많았다(사진 실력이 없어 크기 표현이 안되서 슬프다)>

<쿨한 자동차>

<일본의 고양이들은 포즈가 좋다>

<색다른 풍경>

<四国 第7番 十楽寺>

<四国 第8番 熊谷寺>

<은폐엄폐! 절반의 성공>

<四国 第9番 法輪寺>

 
<어째 날씨가 구리구리 해진다>

<'이새키(?)'의 코인 정미소>

<....>

 
<四国 第10番 切幡寺>

 
  5번 지조지, 6번 안라쿠지, 7번 쥬라쿠지, 8번 쿠마다니지, 9번 호린지, 10번 키리하타지까지 돌고 11번 후지이데라(藤井寺)를 찾아 가다가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고 도로 옆에 뜬금없이 설치된 테이블에 자전거를 세웠다. 식사는 지나가다 저렴해서 구매했던 컵라면과 남은 밥. 가져올려고 챙겨두었던 락앤락통을 두고 온 덕분에 어제 새벽에 해두었던 밥은 코펠에 보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물을 끓이려면 밥을 전부 덜어내야 했다. 뚜껑과 밥그릇에 밥을 덜고 물을 끓였다.

<락앤락 통의 소중함>

<가방으로 바람을 막고>

<우마이봉과 녹차>

 간식으로 우마이봉을 사면서 음료수 값이 생각보다 많이 드는 듯하여 1000ml 100엔가량의 저렴한 녹차를 구매하여 음료수 통에 나누어 담아서 마셨다.

배 한가득 식사를 마치고 다시 11번절을 향해 한참을 달렸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편의점 앞에 있던 왠 오토바이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봤더니 자기 지도책을 펼쳐서 위치를 알려주었다. '나는 엄청나게 반대로 왔구나..' 날도 저물어 가고 나는 일단 반대로 온 길을 되돌아 가야 했다. 11번 절까지 돌고 와서 캠핑하려고 미리 봐두었던 공원으로 갔는데 공원 앞에 도착하자 왠 연못 한가운데에 오리들의 집이 있었다.

<공원 안에 오리섬이 있다>

  나중에 알게된 이 공원의 이름은 카모지마공원(鴨島公園). 일명 오리섬공원이다. 처음엔 오리의 집이 섬처럼 되있어서 이름을 그렇게 지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반대로 그 지역의 이름이 '카모지마鴨島'였기 때문에 공원을 그렇게 조성한 것이었다. 자전거를 끌고 공원을 천천히 돌며 텐트칠 장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작지만 예쁜 공원이었다>

  어제 있었던 첫 캠핑의 기억 덕분에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여기로 정했다!>

  캠핑은 날이 지기 전에 자리를 잡고 캠핑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먼저 텐트를 치고 짐을 전부 들여 놓았다. 가져온 미니 자물쇠로 텐트를 잠궈놓고 아까 못한 설거지도 하고 씻고 빨래도 해서 널었다. 그리고 저녁을 준비.

<설치 완료!>

<빨래도 해서 널고~>

<그다지 맛있게 보이지 않아 반만 오픈!>

  가져온 블럭 육개장을 끓여 남은 밥을 말았다. 지는 해는 나에게 센티멘탈한 기분을 슬며시 내밀었고 그 덕분에 저녁 식사는 먹는둥 마는둥 그렇게 마쳤다. 텐트 옆 벤치에 앉아서 석양을 가만히 보던 나는,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여행에 따라온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센티멘탈한 기분이 슬며시 가라앉는다.

<석양을 머금은 세면도구 친구들, 나와 같은 기분일까>

  그렇게 해가 지고 텐트에 다시 들어왔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는 나가서 먼저 인사했다.

 "곰방와(안녕하세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여기 텐트치면 아마 경찰이 올거라고 얘기했다.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던 아저씨는 잠시 후 관련 공고문이 없어진 걸로 봐선 아마 괜찮을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혹시 담배피우나?"
 아저씨의 물음에 나는 때마침 가지고 있던 담배를 내밀었다. 그다지 친한 녀석이 아니었기에 한움쿰 내밀었는데 1개피면 된다고 하면서 한녀석만 선택되어 불이 붙여졌다.
 "이거 맛있네."
 아저씨가 가져간 1개피 담배는 100엔이 되어 돌아왔는데 내가 사양하자 '오셋다이'니까 받으라고 했다. (오셋다이는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예의)
 "한국은 지금 긴장 상태니 차라리 여기 와있는게 다행일 수 있겠네."
(당시 남북한은 천안함 사건의 진상규명 문제로 긴장이 고조될 때였다.)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담배를 다 피운 아저씨는 자리를 떴다. 나는 텐트 안으로 들어와 정리를 하고 누웠는데 어제 한두시간 밖에 못자서 그런지 일찍 잠에 빠져 들수 있었다.

<취침시 신발을 안에 들여놓는 것을 잊지말자...>

이동 : 키타지마중앙공원 -> 1번 료젠지 -> 2번 고쿠라쿠지 -> 3번 콘센지 -> 4번 다이니치지 -> 5번 지조지 -> 6번 안라쿠지 -> 7번 주라쿠지 -> 8번 쿠마다니지 -> 9번 호린지 -> 10번 키리하타지 -> 카모지마공원
숙박지 : 카모지마공원(鴨島公園)
지출 : 음료 120엔 + 미니 크로와상 126엔 + 녹차 103엔 + 우마이봉 2개 20엔 + 컵라면 약 100엔 = 약 469엔 (이상하게 이 날은 영수증이 한장도 없다. 컵라면의 가격은 메모도 되어있지 않아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 * 수정 - [컵라면 105엔, 합계 474엔] // 2010.11.24 (컵라면 영수증만 발견-_-)


↑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저자 : Lencer, 수정 : menzuru)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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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헨로상(お遍路さん) : 시코쿠 88개소 길을 걷는 순례자.
 * 오셋다이(お接待) : 시코쿠 사람들이 순례자에게 베푸는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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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번절 부터 88번까지의 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여행기는 어떤 종교적인 목적의 순례가 아니라
순례 코스를 통한 '자전거 여행'의 기록 입니다.
참고로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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